색깔 적기

창 밖으로 어둠이 내리기 시작하던 즈음, 나는 어느 전시 공간 안에 혼자 있었다.

1999년의 초겨울 11월 말이었다. 벽에는 사진들이 걸려 있었고 밝은 조명으로 안과 밖의 분위기는 따로 떼어놓은 것처럼 이질적이었다. 두어 시간 동안 표면이 번쩍이는 사진과 하얀 벽과 붉은 칸막이만 보다가 지친 나는 메모 공책을 펼친 채 볼펜만 굴리고 있었다. 뭔가를 끄적이고 싶은 욕구는 메모지에 다음 작업을 위한 구상스케치를 하게했다.
매일 하던 일.

그러다가 재미있을 법한 놀이를 발견했다. 색깔 적기. 색의 이름을, 알고 있는 화학적 이름이 아닌, 내가 보고 느낀 걸 단어로 명명하고 싶어졌다. 그건 내 감정상태에 따라 같은 색이 달라지기도 하고 느낌으로만 알 수 있는 걸 적는거였다. 그리고 두시간….

어느새 140여개의 색들이 이름을 얻었다. 아마도 다른 사람들은 그와는 다른 색들의 이름을 적을 수 있다. 어쩌면 상황이 바뀐 지금, 나 또한 다른 색들을 적을 수 있다. 하지만 그 때 그 시간에 내가 느꼈던 주변의 색들, 머릿속에서 상상되던 색들은 이름을 얻었다. 재미있었던 그 두 시간의 색들을 순서를 바꾸지 않은 채 적어본다. 대부분 독일어와 한글로 동시에 적었지만, 어느 한 쪽만 생각나는 대로 적어놓고 사전을 펼쳐야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 놀이에서 흥미로웠던 건, 눈으로 색을 보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색을 보는 거였다. 같은 톤의 색도 시간과 장소,주변 환경에 따라 또는 개인의 감정, 성격에 따라 다르게 보여진다는 것. 그리고 그것도 이름을 붙일 수 있다는 것. 가끔 말도 안되는 단어가 만들어지기도 하지만, 독일어든 한글이든, 어느 한 단어로 색을 다시 상상할 수 있다면, 감정의 색으로 명명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몇일 내내 나는 거리에서 방안에서 작업실에서 눈에 보이는 것들의 색을 마음으로 보고자하는 습관이 생겼다. 항상은 아니지만.
가끔 다르게 보고, 보이는 것을 생각해보는 건 즐거운 일이다.

 

심심한 색
생생한 색
강한 색
깨끗한 색
극단적인 색
알록달록한 색
무기력한 색
따뜻한 색
차가운 색
돌발적인 색
흔적없는 색
입체적인 색
회화적인 색
뿌연 색
반짝이는 색
장식적인 색
정의할 수 없는 색
무한한 색
이름없는 색
인공적인 색
예술적인 색
자연스러운 색
세련된 색
골때리는 색
역겨운 색
더러운 색
질서정연한 색
물기먹은 색
재미있는 색
눈에 띄는 색
건조한 색
부드러운 색
딱딱한 색
우스운 색
웃기는 색
현재적인 색
미래적인 색
광활한 색
읽을 수 있는 색
가능한 색
완성된 색
우연적인 색
계획된 색
다양한 색
상징적인 색
인간적인 색
표면적인 색

깊이있는 색
가라앉는 색
다른 색
같은 색
투명한 색
긍정적인 색
부정적인 색
중성적인 색
정신적인 색
육체적인 색
아무것도 아닌 색
조형적인 색
테마적인 색
집중적인 색
헐렁한 색
전개된 색
상상된 색
빛나는 색
윤이없는 색
흐린 색
밝은 색
어두운 색
재치있는 색
진지한 색
근사한 색
잠재적인 색
전기의 색
수동적인 색
바보같은 색
아름다운 색
생 색
근본적인 색
아침의 색
저녁의 색
해변의 색
격렬한 색
흥미로운 색
대단한 색
영혼의 색
천국의 색
지옥같은 색
꿈결같은 색
현실적인 색
가상의 색
가슴을 여는 색
좁은 색
수직의 색

수평의 색
향기로운 색
맛있는 색
졸리운 색
잠깨는 색
둥글한 색
각진 색
뾰족한 색
조화로운 색
반사되는 색
창조적인 색
상대적인 색
기표적인 색
기의적인 색
철학적인 색
낭만적인 색
모험적인 색
실험적인 색
화학적인 색
심리적인 색
비밀스러운 색
매혹적인 색
사랑스러운 색
무정한 색
감각적인 색
무시간적인 색
사이에 낀 색
가물거리는 색
긴장되는 색
움직이는 색
굉장한 색
무감각한 색
보다 나은 색
좋은 색
나쁜 색
어지러운 색
부서진 색
개인적인 색
갖고있는 색
밀려오는 색
최상의 색
미끄러운 색
무서운 색
겁나는 색
잔혹한 색
민감한 색
감정의 색

 

1999.ⓒ Kyong 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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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 2000 e1458657940789 book 2000 b Farben-Schreiben, published as a Meisterschüler Catalogue, Braunschweig 2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