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Moment in a room

1.

내게 있어 뭔가를 그린다는 것은 일상을 통해 느껴지는 아름다움이나 간혹 발견되는 또 다른 어떤 것들을 그리는 것이다. 그것은 삶이 변하면서 장소와 시간에 따라 변한다. 독일에서는 물이라는 모티브를 통해 표현했다면 서울에서는 그러한 사건, 감정들을 색채로 시각화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내 일상적인 경험의 기록이라는 측면에서는 지금까지의 작업과 동일선 상에 있지만, 구체적 사물을 빌어 표현했다는 측면에서는 이전 작업과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2.
이번엔 작업실의 사물을 그린다. 작업실이 황당하게 지저분했다. 어떤 물건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겠고, 전혀 다른 물건들끼리 서로 중첩되어 있고 뭘 하나 찾으려면 전체를 다 뒤져야 하고… . 이걸 어떻게 정리를 하나 생각하면서 휘둘러보다가 어떤 모서리 하나를 보았다. 그런데 그 물건이 도무지 무엇이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뚫어지게 보다 보니까 어디 한 곳에 초점이 맞으면서 눈이 약간 아프더니 잠시 후 그곳 상황이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그곳에 있던 사물, 혹은 평면, 또는 그 사물과 다른 사물의 경계 같은 것이 불분명해지면서 앞으로 불쑥 튀어나와 내 앞에 다가서고, 그 주위는 하얗게 탈색된 듯이 형태나 색채를 알아 볼 수 없는 순간을 경험했다.

일상에서 간혹 경험 할 수 있는 색채와 명암에 의한 기하학적 ‘착시현상’의 하나이다. 다른 사물들과의 연결고리는 생략되기 때문에 단지 색이나 면만을 보게 된다. 장소의 선과 형태가 순간적으로 사라지고 부유물처럼 장소를 이동하는 듯한 사물의 이중적인 모습은 내가 이미 알고 있거나 혹은 지식을 통해 배웠다고 하더라도 미쳐 경험해 보지는 못한 또 다른 세계에 대한 상상을 불러 일으킨다. 아무런 밑 칠도 하지 않은 하얀 캔버스 위를 몇 개의 면과 선이 빠르게 달려가는 이미지를 상상해 본다. 절제된 색채와 형태로 어지럽혀진 작업실을 그렇게 화면 위에서 정돈해 본다.

3.
벽 작업은 캔버스를 벽에 고정시키고 그 이미지를 연장해서 연필과 아크릴 물감으로 벽에 그린다. 모든 작업에 벽 드로잉을 추가하는 건 무리가 있고 또 그럴 필요도 없다. 한두 점 정도만 드로잉을 보여주고 나머지는 관객이 상상을 확장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 두고 싶다. 작지만 돌출된 캔버스의 화면과 큰 형태로 자리를 차지한 벽 드로잉은 서로를 보완하면서 하나의 작품이 된다.

4.
나의 이번 작업들은 어쩌면 내가 보고 싶은 것만을 보고 그리는 것일 수도 있다. 그것은 또 내가 타인을, 세상을 보는 방식일 수도 있다. 그렇게 이 그림은 나 자신이 외부의 상황을 어떻게 인식하고 이해하고 상상하는가를 보여준다.

2003.© 이 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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