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조적 고요함의 한 순간

호란트 파스빈더 (브라운슈바익 조형미술대 미술이론 교수)

전체 화면 저 너머로 높아지는 커다란 파도의 감동적이고 활기 넘치는 힘, 이것이 바로 이 경의 대형 그림이 보여주는 피상적인 시선으로 보았을 때의 첫인상이다. 강력한 파도, 쾌속정이 가르는 물살, 미친 듯이 날뛰다 부서지는 파도. 물은 솟구치고 가라앉다가 휘몰아치고 분출하기도 하며, 파도를 덮치거나 해안 바위와 충돌하여 물거품을 만들어낸다. 부단히 변화하고 있건만, 우리 눈에는 시간을 초월하여 이 운동은 영원히 계속되는 듯이 보인다.

많은 그림에서 물의 이러한 운동 옆에는 두 번째로 이와 상응하는 하늘과 대지의 운동이 존재한다. 거기에 안개가 흐르고, 대지는 그것을 덮고 있는 식물의 출렁이는 잎새들로 마치 움직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아주 작은 한 순간 이후에 우리는 이 경의 그림에서 완전히 다른 성격의 두 번째 영역인 역동성의 한 요소를 주목하게 된다. 첫 번째 영역의 움직이는 유기적 형태에 강한 기하학적 형태가 대립하고 있다: 서로 다른 폭을 가진 선들, 직사각형, 가끔은 사다리꼴 형태로. 이 그림 속으로 등장한 잠시 후에는 그 기하학적 형태가 우리에게 먼저 눈에 띄었던 운동과 마찬가지로 동등한 무게를 획득하고 있다.

이러한 수직선이나 직사각형 등에서 처음 스케치 되었던 운동이나 사람이 붙잡아 보기도 전에 이미 사라져버린 피상적 형태의 영원한 변화와는 완전히 다른 세계와 만난다.  여러 개의 선, 직각, 정확함, 날카롭게 잘려진 가장자리는 우리가 세계를 해석하기 위한 또는 그것을 변화시키고 형상화 시키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추상성을 대신하고있다.  대패질 하는 밑판, 원형 톱, 텍스트의 행과 인쇄기, 건축양식, 철로 등 문화적 환경의 수 많은 다른 사물들은- 이 그림의 캔버스와 그림 틀이 최후가 아닌 – 직선과 직각의 기하학을 따르고 있다. 우리의 사고모델은 여기서 – 햇빛, 시간의 경과, 전기소비량과 전기사용료와 같은 x와 y 사이의 종속관계와 마찬가지로 – 직선적이다. 이 경의 그림에서 기하학적 형태의 색채는 항상 비기하학적인 것에서, 움직이는 형태로부터, 말하자면 색채의 표본이라고 할 수 있다. 몇 개의 적은 수의 그림들은 원색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이것 또한 적은 양의 순수한 색채를 혼합했을 때 얻어지는 색채의 다양함을 상상하는 우리 사고의 단순화의 일부일 뿐이다.

그림에 기하학적 형태를 포함시킴으로 해서, 그것은 비기하학적인 움직이는 형태와 서로 반응하고 있다. 거기에서 공간과 그들 사이의 긴장감이 발생한다. 예를 들어, 푸른 바다 위에서 부유하는 초록의 섬처럼 보이는 그림에서 오른쪽의 노란색면은 한 화면 속에서 동등하게 충실한 색채 대조와 또한 견고한 형태 대조로서 극단적인 대치를 형성하고 있다. 그러나 노란 색면의 이러한 특성은 초록의 섬에 대한 환상을 깨뜨린다.  그것은 화면 위에서 색에 대한 어떤 현상을형성하고 있다. 그림은 섬의 초록이 이 노란색과 푸른 바다의 색이 섞여 유래되었음을 상기시키며, 그림이 그림틀 위에 짜여진 것처럼 이 그림이 인간의 작품임을 또한 상기시킨다. 사고에 있어서 현상의 진정한 다양성을 이해하고 재현시키기 위한 도움으로서 데카르트풍의-직각적인- 좌표계는 불완전한 도구임을 또한 일깨운다. 그것은 또한 바다의 분노에서, 자연의 역동성에서-마찬가지로 조망할 수 있는 것, 이해할 수 있는 것 그리고 고요함을 향한 그리움에 대한 현혹 속에서 우리의 한 부분이 이 노란색면으로 구체화되었음을 상기시키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노란 색면이 바다의 흐름을 유지시키는 태양에너지의 암호로서, 에너지원의 한 종류로서 인식 될 수도 있다.

무엇으로 우리가 이 노란 색면을 시작하던지 그것은 저항적이고 반사적이며 우리의 인식과는 거리가 있음을 일깨운다. 움직이는 것, 딱딱한 것, 규모가 큰 우연, 그림 전체를 오가며 물결 치는 형태와 선명하고 조용하며 정확한 노란 색면의 명백함 사이에서 우리의 일부라고 할 수 있는 두 가지-자연과 문명을 느끼며 감동하게 된다. 바로 이러한 단절-아담과 이브의 타락, 인식의 나무열매를 먹음, 파라다이스로부터의 추방- 은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다양성을 인식하게 만드는 자연과의 거리감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경의 그림들은 우리 주변 어디에나 존재하는 세계의 다양성에 대하여 한 인간으로서의 미묘한 상태에 대한 반작용의 한가지 방식이다. 우리는 항상 우리에게 유익하고 적절한 일시적 단순화를 구성해 왔다. 세계의 역동적 다양성에 반해 확실히 관조적 고요함의 한 순간에, 이 경의 그림은 언제까지나 머무르고 있다. 그것의 불가해함을, 또한 그 모든 것이 우리 자신의 이해를 위한 헛된 시도임을 느끼게 하면서.

2000.ⓒ Horant Fassbind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