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예술

8년 전 여름 처음으로 이곳에 도착했을 때, 한국에서 독일에 대한 부족한 정보로 인해 희뿌연 희망과 알 수 없는 꿈을 갖고 있었다. 독일에서의 삶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전혀 없었고, 단지 유럽 미술사에서 다다라던가 바우하우스, 요셉보이스, 신표현주의 그리고 몇몇의 작가들에 대한 미술사 지식이란게 전부였으며, 그것마져도 단편적이고 일방적이었다. 대학에서 한국화가 아닌 서양회화를 전공한 나는 어쩌면 바로 그 유럽 회화사를 뒤쫓아 이곳에 왔는지도 모르겠다.

초등학교 미술 책에 실렸던 세잔의 “생 빅토와르 산” 수채화를 보고 그 담백한 느낌에 감동받아 나도 똑같이 그려보고 싶은 욕구를 느껴 모사했던 기억이 있다. 나중에 세잔의 유화작업을 보았을 때, 나는 놀랄 수 밖에 없었다. 그의 유화작업들은 보는 시각이나 의미를 떠나서 아름다움이 아닌 너무도 탁하고 못 그렸다. 하지만 서양 미술사를 통해서 중요한 것은 잘 그리고 못 그리고에 있는 것이 아닌, 변화하는 삶과 그 삶의 관점을 반영하는 예술가의 사고, 바로 그 시대상을 반영하는 표현 기법의 변화라는 것을 알았을 때, 나는 미술이라는 것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었다.

과연 미술은 무엇인가 ?

일본이라는 필터를 통해 한국에 수입된 서양미술은 그 표면적, 심미적 형식이 먼저 들어왔고 2차대전 이후의 서양미술에 대한 일방통행에서 벗어나, 현재 많은 고찰과 반성을 통해 한국미술 스스로의 정체성과 표현언어를 추구하고 있다. 부언하자면, 전통적으로 자연을 가공하는 인공미를 추구하는 일본과는 달리 한국에서는 자연과의 하나됨을 통한 자연미를 추구해 왔다. 이런 측면에서 근대 한국미술은 첫 단추부터 잘못 채워졌다고 볼 수 있다. 내가 본격적으로 미술을 공부하던 1987년 한국미술은 포스트모더니즘의 초기 수용기였다. 잘못 채워진 첫 단추를 인식하고 바로 잡기위해 많은 시도가 행해졌지만 대학 내에는 여전히 서양미술의 거대한 베일이 존재했고 졸업 후 독일행 비행기에 오르게 됐다.

지난 8년간 나의 독일에서의 삶을 돌이켜보면, 그 어느 때보다 여유롭고 한가하며 사치스럽기까지 했다. 가끔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유지해야 했지만, 자식에 대한 교육열이 높은 한국에서 부모님의 일방적 희생으로 경제적 문제가 해결되고 나는 작업만 열심히 하면 되었다. 이 때 나의 그림은 다분히 관념적이고 다른 세계를 향한 시선이며 동경이었다고 생각한다. 물이라는 구체적인 소재가 드러나기는 하지만 구상도 추상도 아닌 형태로 표현되었다. 나의 작은 체구로 커다란 화폭위에서 자유롭게 오가고 붓질을 하며 그 흔적을 남기면서, 이차원의 평면위에 나 자신의 회화적 조형언어를 찾아 나섰다. 많은 사람들이 설치와 매체로 작업들을 하지만 바로 그런 이유때문에 나는 그림을 놓을 수가 없었다. 회화는 죽었노라고 많은 사람들이 외칠수록 나의 자부심은 더욱 커 갔고, 마치 선물같았던 이 때의 모든 상황 속에서 나는 현재라는 시간과 한 발자욱 떨어져 있는 독일이라는 장소에 의해서 스스로를 돌아볼 수 있는 계기를 갖게 되었다.

나는 아무것도 믿지 않는다. 그것은 미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책을 통해서, 대화를 통해서 나는 많은 작가들이 예술에는 무언가 있으며 그것은 종교의 신과도 같은 위치를 갖는다는 것을 알았다. 유명작가가 아닌 한 전시의 기회도 갖기 힘든 젊은 작가들에게 그 알 수 없는 믿음은 고단한 삶 속에서도 작업을 계속해 나갈 수 있는 힘을 부여한다. 작가 스스로 이 사회의 모든 고민을 짊어지고 변화시켜야 한다는 책임감을 떠 맡는다. 미술작품이 사회를 변화시킬 수있다는 믿음과 사회비평가임을 자처하는 작가상은 나로 하여금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삶과 예술의 의미에 대해서 고뇌하게 만든다.

동시대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그림은 전위적인가? 예술은 전위적이어야만 하는가? 스스로 자문해 본다. 이러한 예술가의 오만과 갈등은 아방가르드 이후 더욱 깊은 삶과 예술의 분리를 초래했을 뿐이고, 예술가의 위치는 이 사회 어디에도 마련되지 않았다. 사회와 역사와 개인적 삶의 고통과 희망은 오직 예술가만이 감지할 수 있고 작품으로 드러낼수 있다는 믿음과 함께 서로 자신들 스스로도 이해하기 힘든 언어와 다른사람들이 알아볼 수 없는 기호를 만들어냄으로써 미술의 배타성은 증대될 뿐이다. 회화작업을 하는 사람이 설치작업을 이해하지 못하고, 또한 역으로 새로운 매체로 작업하는 작가들이 다른 쟝르의 작업을 이해하지 못하는 아이러니가 생긴다.

유럽미술사에서 1500년 이후 회화는 더 이상 수공적 기술이 아닌 과학으로서 아카데미에 포함되고 미술가들의 위치도 격상된다. 그 알 수 없는 믿음은 시대에 따라 보편적 이성-고전주의, 총체성-리얼리즘, 절대적 자아-낭만주의, 유사 종교로서의 예술-세기말 유미주의, 유사 과학적 감수성을 가진 예술의 자기지시적 형식-모더니즘, 아방가르드의자기 파괴적인 진보성-포스트 모더니즘으로 표현되어 왔다. 이러한 믿음의 변화는 물론 시대성을 반영하면서 변화되어 왔지만, 인간의 본성에서 이성에 대한 일방적이고 절대적인 믿음임을 말해준다. 마찬가지로 미술에서는 형식과 내용으로 나뉜다.  20세기 이후의 수 많은 미술사조의 선언문이 잡지, 신문의 형태로 발표되었다. “이 세상의 모든 예술가들에게”로 시작되곤 하던 그 선언문들은 이성의 바탕 위에서 보편적 진리를 찾아 또는 이상적 미를 찾아야 하는 것이 예술가의 임무임을 선언한다. 여기서 예술은 학문이고 철학이며 도덕이다. 유럽미술사는 그들의 사고의 변화를 반영하는, 이성의 변천사이며 생활의 변천사이다. 이 모든 논리적 과정은 알 수 없는 믿음 또는 진리를 찾기 위한 하나의방법인 것이다.

그런데, 미술이 그 진리를 표현할 수 있는가? 
진리는 또한 존재하는가? 
이상적 미: 누군가 모두가 아름답다고 여기는 미를 찾고자 한다면 그는 진정한 이상주의자이거나 독선자이다. 이 세계에 모두가 아름답다고 느낄 수 있는 미란 존재하지 않는다.

내게 있어 미술은 철학이 아니다. 
미술은 역사도 아니고 자연과학도 아니며 하나의 발명품 또한 아니다. 미술은 가르침도 웅변도 계몽적인 것도 아니다. 내가 미술의 정의를 내릴 수는 없지만, 그 어떤 것은 아니라고 부정할 수는 있다. 탄생-성장-죽음은 필연적인 생물학적 인간의 운명이다. 인간의 운명은 필연적이지만 인간인 나는 우연의 산물이다. 내가 찾아야만 하는 삶의 의미나 진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길을 걷다 눈에 띈 초록의 나뭇잎이 몇일이 지나도 잊혀지지 않을 때가 있다. 생전 처음 타보던 비행기 아래 펼쳐지던 시베리아의 강줄기와 구름 사이로 언듯 언듯 비치던 초록의 대지를 기억한다. 일상 속에는 수 없이 많은 아름다움의순간들이 숨겨져 있다. 그것을 그리고 싶은 욕구, 표현해 내고픈 욕구를 느낀다. 작은 나뭇잎에서 세상의 모든 아름다움을 느낀다해도 그러한 욕구가 없다면 작업으로 표현되어 나올 수 없다. 그린다는 것, 무엇을 표현한다는 것은 그래서 그리 단순한 것도 머리로 이해해서 되는 것도 아니다. 그 다음이 어떻게 표현하는가이고 거기에 방법론적인 형식의문제가 개입한다. 회화는 나의 그러한 욕구를 어려움 없이 기록할 수 있는 내겐 익숙한 방법이다. 지난 13년간 나는 그 언어로 속삭이는법을 배웠고 표현하는 법을 배웠다. 나의 작업들은 그래서 그러한 배움의 기록이고 일상에서 발견한 아름다움의 흔적이다. 그것은 직설적으로 이것은 저것이다 식이 아닌 은유가 섞인 한 문장이고 단어이다. 그러한 은유적 표현은 보는이로 하여금 보다 많은 해석과 자신의 상상력을 투영할 수 있는 여유로운 공간이 그림 속에 내재된다.

이제 한국으로 돌아갈 시기가 왔다. 그동안 나는 독일, 독일인, 독일미술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갖고 이해하고자 했다. 어쩌면 한 문화를 이해한다는 것 자체가 본질적으로는 불가능할 것이라는 회의 속에서 8년의 삶으로 그 모든 것을 이해한다는 것은 애초부터 무리가 있었다. 한국과 독일은 많이 다르다. 무엇이 좋고 나쁨을 떠나서 독일은 그 나름의 삶의 형태가 있고 한국 또한 마찬가지이다. 내가 쫓아왔던 현대미술사는 이들의 삶과 문화의 반영이었다. 단편적 지식과 사전의 수준에서 벗어나 그러한 문화를 도출해 내게된 삶과 그 양상을 보면서 보다 깊은 이해를 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현관문을 바로 열면 시작되는 외국인으로서의 삶, 먹고 싶은 아이스크림 옆의 것을 먹으며 시작된 언어문제와 성격차이, 어느 나라나 어려움이 있는 비자문제, 등 한 문화를 이해하고 삶의 다양성을 배우는데 치러야할 댓가도 만만치 않았다. 또한 내가 있어야할 곳, 내가작업을 계속해 나갈 수 있는 곳은 모든 기회의 다양성이 제한되어 있다해도 나의 근본과 문화가 있는 한국이라는 것을 알았다. 이것은 어쩌면 미술의 신성을 믿기보다는 삶에 대한 애정을 선택한 나의 가치관에 의거할 것이다. 미술은 삶의 한 표현이지 나의 삶을 지배할 수는 없다.

여름이 시작되는 5월의 끝에서 이 경 © 2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