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평선 – ON THE HORIZON

작업의 주제는 사람이 없는 풍경이다. 그것은 끈임 없이 계속되는 지평선을 보여준다. 그것은 또한 이 세상에 존재하는 색채의 정보나 조합을 전달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색채의 조합 전체가 가질 수 있는 느낌들… 형용할 수 없는 감정들을 전달하고자 한다.
 

세상이 둥글지 않았으면, 그냥 종이처럼 나무판처럼 편평했으면 좋겠다는 생각…
그래서 가도 가도 끝없이 펼쳐지는 지평선을 보아야만 하는 것이 아니라, 언젠가 한번쯤은 그 끝에 도달했으면 좋겠다는 생각… 다람쥐 쳇바퀴 돌듯 달리고 달려도, 비행기를 타고 아무리 멀리 날고 또 날아가도 결국 뫼비우스의 띠처럼 처음의 그 자리로 다시 돌아올 거라는 걸 예상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 그럴 순 없다, 없기를 언제나 바라고 희망하고 있다는 자각, 그럼에도 세상은 둥글다는 걸 알아버린, 또는 배워버린 비극…에서 나의 의혹은 출발한다.

세상의 끝에는 뭐가 있을까? 뭔가 있기나 한 걸까?
무지개를 찾아가는 아이들처럼 그렇게 슬프게 끝나버리는 동화는 너무 현실적이다. 세상의 끝에 뭐가 있었으면 좋겠다. 수평선이던 지평선이던 그 너머에 갈 수 있다면, 나의 삶이 조금은 의미 있지 않을까? 아니면, 어딘가 정말 있는데, 아무도 도달해 보지 못한 건 아닐까? 그래서 아무도 모르는… 끝없는 지평선, 걷던 달리던 돌아가던 직선으로 가던 계속 어딘가로 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도달할 수 있을 것만 같은 세계..
무모한 일일까?

그래서 나는 인터넷을 통해 세계 여러 곳들을 여행한다.
가 보지 못한 곳들, 가 보고 싶은 곳들, 내가 도달하고픈 그 곳 !
세상에 나 밖에 없다고 느낄 때, 나는 사하라 사막을 검색한다. 서로 다른 사진들 속에서 내가 꿈꾸고 싶었던 요소들을 찾아낸다. 오렌지 빛 태양이 흐르는 모래언덕! 황혼녁의 사막은 온통 어둠뿐이어서 실존할 수 없지만, 내가 가서 직접 체험해 보지 못했지만, 사이버 공간 속에서 찾아낸 이미지들로 나는 그곳을 꿈꾼다. 라벤더 꽃의 들판, 그 위로 흐르는 맑고 투명한 하늘, 먼지나 공해도 없는. 미국 어딘가에 있다는 하얀 모래사막, 언제나 여행잡지에서만 보던 터키블루의 해변, 태양빛의 실체를 보여준다는 북극의 오로라, 등 그 너머엔 무엇이 있을까? 사람이 존재하지 않는 풍경.. 도시이건, 자연이건.
그 한 가운데 내가 서 있고, 지평선을 향해 쉼 없이, 그것을 그린다.

작업은 크게 세 단계로 나뉘어 이루어진다.

1. 디지털드로잉 시리즈
다양한 현실의 이미지들이 디지털 카메라를 통해 디지털화되고 컴퓨터상의 포토샵 이미지들로 변용된다. 그 이미지들은 광고와 대중매체, 인터넷 등의 기타 여러 방법으로 다시 우리들의 현실세계를 재구성한다. 디지털화나 포토샵 이미지 모두 반복, 통합되고 조작, 변형, 단순화 등의 필터를 통해 재구성되는 이미지로, 공간이 배재되고 평면화되면서 물질성이 배재되는 가상의 이미지라는 공통점을 갖는다. 가상의 이미지가 현실로, 현실의 이미지가 다시 가상으로 전이되는 상황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럼에도 본질은 언제나 거기에 있다고 본다. 거기, 우리가 꿈꾸는 그곳은 현실세계 어딘가에 있는 실존의 공간이다.
나는 가상의 세계에서(인터넷) 가상의 이미지들을 가지고 가상의 드로잉을 한다(포토샵 이미지). 픽셀로만 존재하던 그것은 디지털 인화를 통하여 현실세계에 비로소 실존하게 된다.

2. 아크릴 회화작업
아크릴 회화작업에서 보여지는 색채의 병렬 또는 단층은 각자의 폭과 톤으로 작품 전체에 불확실한 공간감을 형성한다. 색들은 분명하거나 혹은 간혹 불분명한 지평선(또는 수평선)을 향해 빨려 들어가듯, 빠르게 혹은 느리게, 전개되고 확실하게 경계 지어진 각각의 색채들은 그러나 어느 것도 확실하게 드러내지는 않는다. 그것은 가능한 만큼 절제되어 있지만 제목에서 암시하는 지명과의 연관으로 어딘가에 분명 존재할 것이라는 상상을 불러 일으킨다.

3. 회화작업 이후의 작업(= AFTER-PAINTING)
아크릴 회화작업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파생되는 색이 칠해진 라인테이프를 이용한 작업이다. 7mm 붉은 테이프의 라인을 따라 양쪽으로 흐르는 거친 붓 터치의 느낌이 그대로 살아있고 그 존재감을 드러내기에 충분한 라인테이프의 빨간색은 단순하게 전개되는 색채의 병렬에 긴장감을 부여한다. 드로잉을 거쳐 작업되는 아크릴 회화와는 다르게 즉각적이고 감각적으로 선택된 라인테이프에 의해 이루어진다. After-Painting은 그래서 아크릴 회화작업을 전제로 그 잉여물에 의해 파생되었다. 아크릴 회화가 절제된 상상을 그리고 있다면 이것은 상상의 본질을 여과없이 그대로 드러낸다.

이 모든 과정은 서로 유기적으로 연관되어 있고 결국 하나의 불가능한 상상을 전제로 한다: 이 세상이 편평했으면.. 그래서 계속 나아간다면 세상의 끝에 도달할 수 있지 않을까? 라는..

2004년 11월 16일 © 이 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