섭리 없는 자연의 조화

Art in Culture 2011. 11월호/ 포커스

이경 9. 28~10. 17 갤러리 아트사간/ 박기진 9. 28~10. 24 공간화랑

이경의 회화와 박기진의 설치작품은 예술사적 문맥보다는 자연에 대한 깊은 탐구의 결과물이다. 이들에게 자연은 예술의 영원한 보고이며, 작품의 내용뿐 아니라 형식의 갱신을 위한 원천이다. 그들의 작품 외관은 매우 단출해 보이지만, 그 내부에는 복잡하게 접힌 굴곡 면과 정교한 메커니즘을 공통적으로 담고 있다. 마주한 색면 또는 기계적 단면들은 끝없는 연쇄 망을 이루며 통과시킨다. 이경의 개인전에는 떼어낸 테이프 가장자리로 미세하게 쌓인 면과 면, 색과 색, 형과 형 사이를 구분 짓는 물감의 가느다란 층이 있다. 그리고 박기진의 전시에는 여러 크기의 통과 관이 결합되어 작동되는 기계들이 있다. 이 두 전시는 연속성의조건으로 ‘불연속성’에 주목한다. 연속과 불연속성, 더 나아가 필연과 우연의 관계는 예술뿐 아니라, 고대 자연철학으로부터 시작된 오랜 화두였다.

가능한 색의 수평
장 살렘은 [고대 원자론]에서 고대 원자론자들은 존재가 본질적으로 ‘불연속’이라는 사실을 공표함으로서 경험적 외양들, 무엇보다도 운동을 이해할 수 있다고 지적한다. 한편 반대자들은 ‘전체는 하나이며 영원하고 흔들림이 없으며, 완결된 것’(파르메니데스)이라고 가르쳤다. 반대자들은 운동이 그저 환영에 불과하다고 본다. 장 살렘은 섭리를 통하여 연속성과 필연성을 주장하는관념론에, 불연속성과 우연성을 주장하는 유물론을 대조시킨다. 그의 분류에 의하면 현대 과학 역시 공유하는 고대 원자론자들의 가설은 유물론적이다. 그들에게 원자들의 운동은 그것을 결정하는 어떤 외부의 강제력, 즉 필연의 결과물이 아니다. 원자론자들의 필연 개념은 관념론처럼 기원과 최후의 목적을 가정하지 않는다. 우주에서 벌어지는 생성과 소멸은 이미 있어 왔고, 영원히 있을 것이다. 이경과 박기진이 출발하는 하늘이나 물 역시, 그것이 시작되고 끝나는 지점은 불확실하다. 하지만 자연이든예술이든 불연속적 흐름을 이어 가려는 노력은 계속된다.

화가인 이경은 다양한 계열로 펼쳐지는 색의 띠로 일련의 풍경을 암시한다. 비재현적인 화면에서 풍경을 떠올리게 되는 것은 수평선이나 지평선을 떠오르게 하는 ‘수평면’ 때문이다. 다양한 두께의 테이프를 동원하여 그어진 수평면을 채우는 색상 역시, 하늘이나 바다 같이 끊임없이 변화하는 광대한 자연의 캔버스를 연상시킨다. 작품 제목에는 ‘풍경’과 ‘그림’이라는 단어가 같이 등장한다. 작가 말대로 ‘그림은 현실을 담고 있지만, 실재하지 않는 공간, 색, 깊이로 표현된다.’ 그것은 ‘가능한 색의 수평’(전시부제)을 만든다.

풍경과 그림을 동시적으로 매개하는 것은 언어이다. 그러나 미묘한 색의 계열로 이루어진 그 언어는 ‘언어 밖의 언어’이다. 공간은 시간의 흐름을 따라 주욱 쌓여 가고, 시간은 켜켜이 쌓인 지층처럼 공간화된다. 먼저 칠해진 색은 그 다음 색을 부르고, 형태는 미리 정해진 것이 아니라 색의 전이로 귀결된다. 이전 작품에서는 점진적으로 쌓이는 수평적 색의 띠가 주를 이루었지만, 이번 전시에서는 변화무쌍한 형태의 변주가 주가 된다. 캔버스에 아크릴 물감으로 그려진 작품들은 (mistylandscape_) 시리즈만수평의 색 띠로 되어 있으며, (picture_) 시리즈는 하나의 단위를 이루는 층 내부에도 색과 형태의 전이가 일어난다. 테이프를이용하지 않고 자유롭게 죽죽 선으로 그은 작은 작품들도 걸려 있다. 이전 작품은 부드럽고 잔잔했지만, 이번 작품은 대립과 충돌을 싸안으면서 자연의 조화보다는 역동성에 강조점을 둔다. 자연에서 벌어지는 모종의 사건에 의해 안정된 구조는 파문을 일으키며 변동한다.

수평을 이루는 기계들
박기진의 전시 역시 물과 같은 자연의 유동적 요소를 다룬다. 이경의 경우 수평의 색면이라는 규칙이 관철된다면, 박기진은 자신의 상상을 정교한 장치로 구체화한다. 허구는 3차원 공간 속에서 원래부터 그런 것이 있었다는 듯이 당당하게 서 있다. 깃털같이 가벼운 허구는 육중한 물체로 구현되어 지상에 한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다. 이 맥락에서 보자면 전시장 안의 이상한 기계들은 발명이 아니라, ‘발견’(전시 부제)된 것이다. 대서양 저편의 친구와 통화하던 중 작가는 둘 사이가 물로 연결되어 있음을 자각하고, 일련의 순환 장치를 통해 만물이 연결되어 있다는 고대의 자연 철학을 구현한다. 거대한 호수는 이러한 연결망에서 분리된 물을 상징하며, 작가는 아프리카의 두 호수를 연결시키겠다는 발상을 이어 간다.

전시장 입구에 들어가자마자 보이는 거대한 물구덩이는 두 호수의 연결관 단면에 해당된다. 거대한 터널을 채우는 출렁거리는물의 영상은 관객을 빨아들일 듯 몰입시킨다. 지하층에서 보면 낡은 금속관만 보인다. 전체로 조망되는 예술작품이기보다는, 실제 공간에 설치되어 작동 중인 사물의 면모를 강조한 것이다. 분리된 두 호수에는 서로 다른 모양새의 물고기가 서식하는데, 원래는 한 종이었다가 각각 진화하여 분화되었다. 작가는 이 둘을 만나게 해 주고 싶었고, 또 다른 전시실에 그것이 가능할 법한거대한 부표같은 구조물을 만들었다. 이 기구가 호수에 실제로 띄워진다면, 물거품이 떠오르는 기계 윗부분으로 물고기가 올라가서 주변을 둘러보며 동족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부글거리는 거품, 번쩍이는 빛, 간헐적으로 들리는 소리는 기계가 그냥 서있는 것이 아니라 작동 중임을 암시한다.

전시장 벽면에는 그것들이 실현될 수 있는 정보가 매뉴얼처럼 새겨있고, 터널 사이로 빠져 나가는 물의 흐름은 8개의 패널을 수평으로 배치하여 표현한다. 박기진의 작품 역시 이경의 작품처럼 수평 맞추기가 중요하다. 수평이라는 기준 선 위 아래의 자그마한 차이와 간극들이 만물을 흐르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기준이 없다면, 흐름은 원초적 혼돈에 머물 것이다. 미끈한 표면만으로 이루어진 전보기기가 지배하는 현대의 시각에서 이 기계는 고대 유물처럼 생겼다. 그것은 형태에서 기능을 유추할 수있는 아날로그형식의 정점에 놓여 있다. 환상적이면서도 부조리해보이기까지 하는 이 기계는 유토피아 또는 디스토피아로 우리를 데려 갈 매개체이다.

자연의 재배치
이경과 박기진의 작품에서 자연의 법칙은 작가가 정한 규칙에 의해 재배치된다. 자연은 공통적 감각뿐 아니라, 이질성의 근원이기도 하다. 그들의 작품은 이전에 없었던 것들이 생기는 경우지만, 대부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끝나고 마는 자의성에 머물지않는다. 반대로 거기에는 긴장감 있는 구조들이 가득하다. 이 구조를 통해서 비로소 사건이 일어난다. 또는 활성화된다. 구조주의 인류학자 클로드 레비 스트로스가 [슬픈 열대]에서 말하듯이 자연 사회 문화의 관계에서 임의적인 것은 없다. 예술은 단순히비합리적이고 비논리적인 충동의 산물이 아니라, 원시인들이 그러하듯이 자연적 환경이 제공하는 것을 논리적이고 체계적으로조직화하는 것이다.

매우 절제되고 엄격해 보이는 그들의 그림과 설치는 코드를 추구하는 과학과 달리, 주어진 것을 계열별로 나누고 불연속적 요소를 간과하지 않으면서, 경험된 자료들을 재정리하는 의미론적 체계를 이룬다. 그점에서 그들은 ‘야생적 사고’(레비 스트로스)를한다. 물이나 대기같이 유동적이고 불안정한 요소는 내포적 다양성을 가지는 구조의 유희를 통해 자연과는 다른 스펙트럼으로정연하게 펼쳐진다. 자연을 참조하여 작품으로 구현하는 그들의 작품은 구조적이지만, 그들의 방식은 관념적이지 않다. 물과 대기를 이루는 미립자들의 운동이 이런저런 방식으로 구획되고 흘러가기 위해서는 연속과 불연속의 관계가 중요하다. 자연이든예술이든 합리적 단위로 나뉘어짐은 연속성을 위한 전제 조건이다. 
그것은 고대 원자론자들까지 소급될 수 있다. 장 살렘은 [고대 원자론]에서 고대의 자연철학자 루크레티우스를 인용한다. 그는물질 원소들의 쉼 없는 동요를 묘사하면서, 심원한 허공에서 제1물체들에는 어떤 정지도 허락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햇살에 비추어지는 먼지 같은 원자는 기계적 연속성의 운명에서 벗어난 자유로운 운동을 한다. 루크레티우스는 우주는 전체적으로 무한하며 그것의 부분 집합인 물질과 거대한 허공도 역시 무한하다고 본다. 이 무한한 우주 내에서 온갖 종류의 결합과 배치 덕분에원자들은 바로 이 세계를 조성한다.

예술가들은 자연처럼, 결정된 계획이나 섭리 없이 원자들을 저마다 자기 자리에 맞게 정렬시킨다. 자유와 조화를 위해 어떤 선험적인 섭리 같은 것이 전제될 필요는 없다. 섭리가 전제되지 않는 ‘쾌’야말로 예술적인 것이다. 장 살렘은 다소간 기계적으로개념화된 고대 원자론은 자연스럽게 자유사상으로, 그리고 쾌락의 철학으로 이어졌다고 지적한다. 에피쿠로스를 비롯한 쾌락주의자들에 따르면, 감각되지 않는 입자들로 이루어진 이 우주에서 원자론자들은 유한한 이승의 삶 속에서도 강렬하고 지속가능하며, 완벽한 행복에 도달할 수 있다. 쾌락은 방종이 아니라 더 평온하고 더 안정적이며 더 빛나는 것이다. 에피쿠로스는 쾌락의반대편에 절제된 삶을 놓지 않았으며, 그저 쾌락은 잘 이해된 생의 에너지라고 하였다. 쾌락이란 우리가 타고나는 것으로, 모두에게 공통된 성향이다. 이경과 박기진의 작품이 자연에서 끌어내는 것은 이러한 보편성이다.

2011 © 이선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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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horizon of possible colors – Solo Exhibition, Art Sagan, 2011